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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권율의 빛

치열하지만 즐겁게, 은은하지만 명징하게. 가장 유연한 방식으로 꾸준히 존재를 증명해온 배우 권율의 빛나는 오늘.

기사, 사진제공 | 더갤러리아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커넥션’과 방영 중인 ‘놀아주는 여자’ 두 작품으로 활동하느라 한동안 정신없이 지냈을 텐데, 어떤 일상을 보내고 있는지 궁금하다.
‘놀아주는 여자’도 이미 촬영을 다 마친 상태이기 때문에 아주 오랜만에 쉬고 있는 요즘이다. 운동도 하고, 사람들을 만나 맛집도 다니고, 방영되는 작품들을 보면서 촬영 당시를 반추해보기도 하면서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무엇보다 당장 외워야 할 대사가 없는 이 자유로운 시간을 만끽하고 있다.(웃음)

‘커넥션’과 ‘놀아주는 여자’ 모두 검사 역할이지만 한쪽은 완전 악역, 한쪽은 선한 역할이다. 이렇게 상반된 역할을 준비하고 또 연기하는 과정에서 힘들었던 점이나 혹은 반대로 즐겁고 재미있었던 에피소드도 있었을 것 같다.
공교롭게 두 작품이 동시에 방영됐지만 촬영 시기는 각각 달랐고, 오히려 둘 다 선한 이미지의 검사 캐릭터로 분했던 ‘놀아주는 여자’와 ‘오랫동안 당신을 기다렸습니다’의 캐릭터 변별점을 찾는 데 더 집중했다. 이후 ‘커넥션’을 촬영할 땐 악역인 ‘박태진’이라는 인물을 커다란 욕망과 절대적 목표를 향해 주저없이 달려가는 캐릭터로 설정해 이를 목표점으로 잡고 연기했다.

화이트 티셔츠는 질 샌더, 벨티드 데님 팬츠는 르메르, 안경은 모스콧, 시계는 오메가 제품. 슈즈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 박태진이라는 인물은 그동안 권율이 연기해온 악역의 집합체 같은 느낌이었다. 그동안 차곡차곡 쌓은 ‘악역’ 데이터베이스가 이 역할 안에서 완성돼 폭발한 듯하다. 이렇게 에너지를 많이 쏟아야 하는 역할이나 살면서 만나기 힘든 인간 군상을 연기할 땐 스스로도 많이 힘들 것 같다.
    그런 경계선을 철저히 구분하는 배우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건 작품 속 세상의 일이고, 또 다른 권율로서의 삶이라고 말이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이 반복되면 마치 이틀 전 옷에 뿌려둔 향수처럼 의식하지 못한 어떤 순간에 ‘향’이 배어 나오게 되더라. 난 익숙해져 아무 냄새도 안 나는 것 같은데 만났던 누군가가 “향수 냄새 좋네?”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캐릭터를 일정 기간 온전히 연기하며 관통하고 나면 누군가의 피드백을 통해 그 역할이 향처럼 스며들어 있는 걸 느끼게 되는 순간이 있다.

    상하의는 모두 서커스폴스, 슈즈는 크로켓앤존스 제품.

  • 여러모로 ‘커넥션’은 그간의 필모그래피에 있어 기억에 가장 명징하게 남을 만한 작품인 것 같다.
    어떤 작품을 하든 얻는 게 있는데, 이번엔 하나의 공동체가 팀워크를 통해 이룰 수 있는 많은 지점들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전엔 나 스스로 뭔가를 증명하고 한 신을 홀로 하드 캐리해야 된다는 생각이 컸다면, 이번 작품은 동료 배우들과 허심탄회하게 의논하며 그간 홀로 짊어졌던 무게를 나눠 가지는 듯 마음이 편했다. 아마 다음 작품에 임할 때도 이런 경험을 근간으로 또 다른 도전을 할 수 있겠지.

    두 작품이 끝나고 얼마 전 마친 인터뷰에선 한량 역할이나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 도전해보고 싶다고 했더라. 악역을 맡아 잘 소화해냈고, 지금도 그런 제안들이 많이 들어올 테니 밝은 캐릭터에 대한 갈증이 당연히 생기리라 여겨진다.
    이젠 조금 ‘헐렁한’ 캐릭터를 연기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빈틈도 좀 있고, 특유의 엉뚱함이 매력인 그런 캐릭터 말이다. 얼마 전 특별 출연했던 ‘비밀은 없어’라는 드라마에서 약간 나사가 풀린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굉장히 재미있었던 기억이 난다. 개인적으로도 “저 사람 좀 은은하게 돌았다”는 얘기를 듣는 게 즐겁다.(웃음)

    그레이 니트 톱과 쇼츠는 모두 디올 맨 제품. 슈즈와 삭스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 2007년에 데뷔해 꾸준히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다. 정말 한 해도 빼놓지 않고 작품을 해왔는데 쉬고 싶을 땐 없었나?
    글쎄, 이 일을 하면서 피로감이나 무력감을 느끼는데도 어쩔 수 없이 임한 적은 없었다. 그저 일을 지속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작품 활동을 통해 꾸준히 존재를 증명하는 게 내 직업이라고 생각하니까. 물론 다작이 무조건 옳다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간헐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는 게 더 좋다는 의미도 아니다. 정답은 없다. 살면서 계획한 게 다 뜻대로 이뤄지진 않지만 그때그때 주어진 걸 의미 있게 받아들이며 명분과 미덕이 있다 판단되면 과감하게 도전하는 게 내 스타일이다. 물론 나도 사람이니까 생각했던 것만큼 일이 풀리지 않을 땐 ‘조금 쉴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것도 한순간이고, 지나고 나면 뭐든 배운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긴 배우 생활을 지속해오는 데 큰 밑거름이 된 것 같다.

    아이보리 티셔츠와 블랙 벨티드 팬츠는 모두 르메르, 안경은 모스콧, 시계는 오메가, 블랙 페이턴트 슈즈는 레페토 제품. 네크리스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 꾸준히 일하며 시대의 변화나 흐름을 체감할 때가 많을 듯하다. OTT, 유튜브, 개인 SNS 등 다양한 미디어 플랫폼이 등장했으며 순기능과 역기능, 방대한 콘텐츠 속에 혼란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이런 시대의 흐름에 대해 배우로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전 세계가 팬데믹이라는 특수한 시기를 거치며 급속히 OTT 등의 플랫폼에 몰두하게 된 것 같다. 방대한 양의 콘텐츠들이 필터링 없이 쏟아져 나왔지만, 이제 시간이 지나며 순차적으로 정화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배우로서는 플랫폼이 많아진 만큼 작품 선택에 더욱 신중해지고 있으며, 제작 환경에 있어서는 오히려 배우들을 위한 풀이 더 작아진 느낌도 든다. 과도기를 거치면 퀄리티로 증명해내는 좋은 콘텐츠들이 더 많아지고, 배우들을 위한 풀도 다시 확장될 거라 생각한다. 한국의 콘텐츠가 세계에서도 통한다는 사실은 이미 증명된 바, 지금 이 시기에 실력을 잘 가다듬으며 준비해야 할 것 같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지만, 어느덧 2024년 하반기가 도래했다! 올해가 가기 전 꼭 이루고 싶은 일들은 어떤 것인가? 꼭 본업인 배우 일이 아니어도 좋다. 권율 일상의 소소한 버킷 리스트도 궁금하다.
    올해는 본업인 연기로 연말에 상을 받고 싶은 욕심이 있다. 아직 상반기니까, 하반기에 좋은 작품을 많이 해서 성과가 있었으면 좋겠다. 물론 상이 뭔가를 검증하고 증명하는 건 아니지만 오랜만에 그런 자리를 즐겨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길 바라고 있다. 일상의 버킷 리스트라면, 개인 교습으로 꾸준히 배운 기타를 좀 더 잘 치고 싶다는 것? 김광석의 노래들을 전부 다 기타로 연주할 수 있을 만큼 실력이 좀 늘었으면 좋겠다.(웃음)

    블랙 오픈 칼라 티셔츠는 메종 마르지엘라, 네크리스와 링은 모두 톰 우드 제품. 아이보리 티셔츠와 데님 팬츠, 시계와 벨트는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